돌 탕의 축복’ 문한주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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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한주 집사 간증(제자대학2기 졸업자)
먼저 간증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간증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저에게는 또 다른 은혜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는 묻지 않으신다고 하셨지만 오늘 간증을 통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지난 수요일 ‘돌아온 자의 축복’이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저는 ‘돌 탕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저는 4대째 내려오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부모님께서는 장로님과 권사님으로 평생을 고향의 한 교회를 섬기시다 소천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믿지 않는 가정이었는데 외가에서는 유일하게 믿는 가정으로 시집오셨습니다. 시집을 가장 잘 오신 것이지요. 서울로 올라오신 부모님은 가난한 형편에 많은 자녀를 돌보시느라 교회와는 먼 생활을 하셨습니다. 저도 중학교를 올라오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저희 집에 오실 때마다 ‘교회 잘 다니냐? 교회 꼭 나가라.’ 어머니와 저를 붙잡고 얘기하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다가 제가 대학에 갈 즈음 어머니께서 옆집에 이사 오신 아주머니의 소개로 작은 개척교회를 나가시게 됐습니다. 매일 같이 새벽기도 가셨다가 일가시고 틈만 나면 커다란 안경을 쓰시고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제가 ‘엄마, 그거 읽으면 뭔 말인지 알아요?’ 했더니, ‘아니, 나 같이 무식한 사람이 뭔 말인지 알겠냐? 그저 읽으면 좋다고 하니까 읽는 거지. 그래도 거의 다 읽었다.\' 하셨습니다. 저희 가족 중 어머니께서 가장 먼저 성경 일독을 하신 셈입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일정액 십일조도 하고 어머니와 함께 건축헌금도 (그 당시는 꽤 큰돈을) 작정해서 드렸습니다. 그 땐 건축헌금의 의미도 모르고 그 축복도 모른 채 드렸습니다. 상가 건물이 아니라 그저 번듯한 교회가 세워지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모범생이었던 저는 원하던 대학 진학에 실패하면서 처음으로 인생의 좌절과 절망을 느꼈습니다. (저는 386세대입니다)대학은 매일 최루탄 가스와 시위로 얼룩졌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가르쳐야할 동생이 넷이나 있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서 모든 것이 버겁고 힘들었습니다. 방화동에서 신월동으로 이사 오면서 그나마 교회도 정하지 못하고 완전히 세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돈으로 세우고 돈만 벌었습니다. 강남의 학원 강사, 개인 과외를 몇 개씩 하면서 일만 했습니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이 아니라 차에서 점심을 때우며 지독하게 일만 했습니다. 완전 일 중독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안 먹고 안 쓰고 쌓이는 통장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통장 하나가 생길 때마다 막연하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쓰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술값이었습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아시지요. 그 쓸쓸함을 돈이 해결해주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술에 많이 의존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이 재미없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술 마셔도 다시 깨어나면 힘든 삶이 여전히 앞에 있고, 언젠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힘든 삶을 등지기 위해 술만 먹다가 죽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죽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정말 죽도록 마셔보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삶의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결혼을 생각했고 보통 남자가 여자에게 ‘내 아이를 낳아도’ 하는데 저는 남편에게 ‘내 아이를 낳아도’ 하는 마음으로 결혼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스럽고 귀한 자녀를 주시면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겠다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귀한 아들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저는 집 가까운 작은 교회에 등록하고 나름대로 주일 성수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힘든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그저 심성만 착한 남편과는 성격적으로나 살아가는 방식이 너무 달라 매일 싸웠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고 아들에게 계속 싸우는 모습 보여주는 것도 미안했습니다. 결국 남편에게 ‘이혼합시다. 그게 서로의 살길입니다.’ 남편은 처음엔 들은 척도 안하다가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 다음 날 법원기기로 했는데 갑자기 아들이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법원이 아니라 병원엘 가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남편은 다른 일 하겠다고 회사까지 그만두고 정말 모든 것이 지옥 같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품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저와 아버지의 집을 다 정리하고 신월4동으로 이사 왔고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가기로 하고 서울서부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저는 금요 철야기도회에 와서 눈물로 찬양하며 일 년 가까이 회개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 온 저에게 용서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줄 사람을 선택하시고 훈련시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은혜 주셔서 선택하셨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광야를 걷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인생이 허망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저와 함께 계셨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젊은 시절 막연함으로 드렸던 건축헌금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셨습니다. 월세 살 때 건축헌금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5년 뒤부터 저희 가정에 집을 주시기 시작하셨는데 매년 한 채씩 주셔서 저희 부모님, 저와 저희 동생들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이번에 ‘한 평 드리기’를 하면서 셀 가족들이 고민할 때 저는 이 간증을 하면서 건축헌금이 주는 축복을 강조했습니다. 믿음이 회복되면서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토록 술을 좋아하던 제가 술을 끊었다고 말할 것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도 신기해서 일부러 양주 한 병을 잘 보이는 곳에 두었습니다.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제가 변하니까 가족들도 변했습니다. 가정이 영적으로 충만해지니까 명절이면 모여서 술 마시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시어머니 제사도 접었습니다. 이제는 추도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부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남편까지도 제자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격이나 성품은 그대로지만 오직 주님이라는 하나 된 가치관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싸울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이 형통해지고 평안해지는 축복을 예비해 두셨고 저희 가족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는 말씀처럼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 축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랐던 저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켜주시고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시련과 훈련을 통해 저를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주셨습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리니.’)(빌 2:13)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두신 소원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소원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가족을 사용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저 같은 죄인을 위해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이 놀랍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찬양151장)는 예수님을 향한 저의 신앙고백이며 ‘늘 울어도 그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라는 가사처럼 그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지만 제 가슴 속에 늘 새기며 주신 사명을 감사와 은혜로 감당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먼저 간증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간증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저에게는 또 다른 은혜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는 묻지 않으신다고 하셨지만 오늘 간증을 통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지난 수요일 ‘돌아온 자의 축복’이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저는 ‘돌 탕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저는 4대째 내려오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부모님께서는 장로님과 권사님으로 평생을 고향의 한 교회를 섬기시다 소천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믿지 않는 가정이었는데 외가에서는 유일하게 믿는 가정으로 시집오셨습니다. 시집을 가장 잘 오신 것이지요. 서울로 올라오신 부모님은 가난한 형편에 많은 자녀를 돌보시느라 교회와는 먼 생활을 하셨습니다. 저도 중학교를 올라오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저희 집에 오실 때마다 ‘교회 잘 다니냐? 교회 꼭 나가라.’ 어머니와 저를 붙잡고 얘기하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다가 제가 대학에 갈 즈음 어머니께서 옆집에 이사 오신 아주머니의 소개로 작은 개척교회를 나가시게 됐습니다. 매일 같이 새벽기도 가셨다가 일가시고 틈만 나면 커다란 안경을 쓰시고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제가 ‘엄마, 그거 읽으면 뭔 말인지 알아요?’ 했더니, ‘아니, 나 같이 무식한 사람이 뭔 말인지 알겠냐? 그저 읽으면 좋다고 하니까 읽는 거지. 그래도 거의 다 읽었다.\' 하셨습니다. 저희 가족 중 어머니께서 가장 먼저 성경 일독을 하신 셈입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일정액 십일조도 하고 어머니와 함께 건축헌금도 (그 당시는 꽤 큰돈을) 작정해서 드렸습니다. 그 땐 건축헌금의 의미도 모르고 그 축복도 모른 채 드렸습니다. 상가 건물이 아니라 그저 번듯한 교회가 세워지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모범생이었던 저는 원하던 대학 진학에 실패하면서 처음으로 인생의 좌절과 절망을 느꼈습니다. (저는 386세대입니다)대학은 매일 최루탄 가스와 시위로 얼룩졌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가르쳐야할 동생이 넷이나 있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서 모든 것이 버겁고 힘들었습니다. 방화동에서 신월동으로 이사 오면서 그나마 교회도 정하지 못하고 완전히 세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돈으로 세우고 돈만 벌었습니다. 강남의 학원 강사, 개인 과외를 몇 개씩 하면서 일만 했습니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이 아니라 차에서 점심을 때우며 지독하게 일만 했습니다. 완전 일 중독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안 먹고 안 쓰고 쌓이는 통장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통장 하나가 생길 때마다 막연하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쓰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술값이었습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아시지요. 그 쓸쓸함을 돈이 해결해주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술에 많이 의존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이 재미없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술 마셔도 다시 깨어나면 힘든 삶이 여전히 앞에 있고, 언젠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힘든 삶을 등지기 위해 술만 먹다가 죽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죽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정말 죽도록 마셔보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삶의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결혼을 생각했고 보통 남자가 여자에게 ‘내 아이를 낳아도’ 하는데 저는 남편에게 ‘내 아이를 낳아도’ 하는 마음으로 결혼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스럽고 귀한 자녀를 주시면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겠다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귀한 아들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저는 집 가까운 작은 교회에 등록하고 나름대로 주일 성수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힘든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그저 심성만 착한 남편과는 성격적으로나 살아가는 방식이 너무 달라 매일 싸웠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고 아들에게 계속 싸우는 모습 보여주는 것도 미안했습니다. 결국 남편에게 ‘이혼합시다. 그게 서로의 살길입니다.’ 남편은 처음엔 들은 척도 안하다가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 다음 날 법원기기로 했는데 갑자기 아들이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법원이 아니라 병원엘 가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남편은 다른 일 하겠다고 회사까지 그만두고 정말 모든 것이 지옥 같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품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저와 아버지의 집을 다 정리하고 신월4동으로 이사 왔고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가기로 하고 서울서부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저는 금요 철야기도회에 와서 눈물로 찬양하며 일 년 가까이 회개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 온 저에게 용서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줄 사람을 선택하시고 훈련시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은혜 주셔서 선택하셨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광야를 걷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인생이 허망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저와 함께 계셨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젊은 시절 막연함으로 드렸던 건축헌금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셨습니다. 월세 살 때 건축헌금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5년 뒤부터 저희 가정에 집을 주시기 시작하셨는데 매년 한 채씩 주셔서 저희 부모님, 저와 저희 동생들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이번에 ‘한 평 드리기’를 하면서 셀 가족들이 고민할 때 저는 이 간증을 하면서 건축헌금이 주는 축복을 강조했습니다. 믿음이 회복되면서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토록 술을 좋아하던 제가 술을 끊었다고 말할 것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도 신기해서 일부러 양주 한 병을 잘 보이는 곳에 두었습니다.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제가 변하니까 가족들도 변했습니다. 가정이 영적으로 충만해지니까 명절이면 모여서 술 마시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시어머니 제사도 접었습니다. 이제는 추도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부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남편까지도 제자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격이나 성품은 그대로지만 오직 주님이라는 하나 된 가치관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싸울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이 형통해지고 평안해지는 축복을 예비해 두셨고 저희 가족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는 말씀처럼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 축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랐던 저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켜주시고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시련과 훈련을 통해 저를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주셨습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리니.’)(빌 2:13)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두신 소원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소원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가족을 사용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저 같은 죄인을 위해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이 놀랍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찬양151장)는 예수님을 향한 저의 신앙고백이며 ‘늘 울어도 그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라는 가사처럼 그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지만 제 가슴 속에 늘 새기며 주신 사명을 감사와 은혜로 감당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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